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대서양 조약 기구 (문단 편집) === 냉전과 창설 ===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소련의 물밑 작업으로 1~2년 사이에 동유럽이 도미노처럼 모두 공산화되자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큰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한편 패전국 독일은 연합국이 4분할 점령하고 있었는데, 미영불 3국은 독일에서 군정을 끝내고 민주적 총선을 통해 새로운 민주 정부를 만들어 독립시키는 방안을 추진했다. 하지만 소련은 타 동유럽 지역에서 했던 방식과 마찬가지로 이미 1946년 독일의 자국 점령 지역, 즉 동독에 [[사회주의통일당]](SED)이라는 괴뢰 공산당을 만들어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부터 있던 기존 [[독일 공산당]]과 [[독일 사회민주당]] 등 동독의 좌파 세력을 복속 혹은 숙청하여 동독을 장악한 상태였으며 당연히 소련은 독일에 민주적 총선을 실시하여 독립시키자는 미영불 3국의 방안을 반대하였다. 결국 독일 총선 및 독립 방안이 미영불 측과 소련의 대립으로 합의에 이르지 못하며 좌초되고 있었다. 1947년이 되자 소련이 동독을 정치적으로 장악한 것이 자명해졌고,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이 동독 지역에서 독일의 화폐인 라이히스 마르크화를 일방적으로 평가절하하는 조치를 취하자, 미영불은 이에 대항하여 3개국 점령 지역, 즉 서독 지역에서 아예 [[독일 마르크|마르크화]]라는 새로운 화폐를 만들어 유통시켰다. 이로써 서독과 동독이 경제적으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서독의 마르크화가 서베를린에도 유통되자, 소련은 이에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서베를린을 모두 차지할 목적으로 [[베를린 봉쇄]]를 단행했다. 당시 서베를린은 동독 한복판에서 수십만 명의 [[소련군]]과 [[국가인민군|동독군]]에 포위되어 있는 상태였으며, 소련은 서베를린에 대한 모든 물자 및 전기 공급을 중단함으로써 아사 위기에 처한 서베를린이 소련과 동독에 굴복할 것이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국을 필두로 영국, 프랑스, 그리고 캐나다, 호주 등 서방 국가들은 베를린 공수작전을 펼치며 220만 서베를린 시민들을 위한 막대한 생필품을 수송기를 통해 실어날랐다. 베를린 봉쇄로 소련의 팽창주의와 군사적 위협이 서방으로까지 확대되자 위협을 느낀 서유럽 국가들은 군사적 동맹을 창설하기로 긴급히 합의하고, 이에 양측 간에 [[냉전]]이 시작되며 베를린 봉쇄가 진행 중이던 1949년 4월 4일, [[북대서양 조약]]이 조인되어 나토가 창설되었다. 8월 24일부터 조약의 효력이 발생하기 시작했는데, 일반적으로 4월 4일을 창설일로 본다. NATO 창설 국가는 미국, 영국, 캐나다,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이탈리아, 노르웨이, 덴마크, 아이슬란드, 포르투갈 등이었다. 처음에는 미국, 영국, 캐나다,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북미와 서부·중부 유럽 국가들 중심으로 창설 협의가 시작되었는데, 베를린 봉쇄로 위기감을 느낀 북유럽과 남유럽 국가들도 대거 참여를 희망해오면서 창설국이 늘어나서 중립국(스위스, 오스트리아, 스웨덴)을 제외한 서유럽 국가 대부분이 NATO 창설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사국은 유럽 또는 북미에서 발생하는 회원국 중 하나 이상에 대한 무력 공격이 회원 모두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된다는데 동의하며, 따라서 그러한 무력 공격이 발생하는 경우 유엔 헌장 제51조에 의해 인정된 개별적 혹은 집단적 자위권 행사 차원에서 북대서양 지역의 안보를 복원 및 유지하기 위해 무력의 사용을 포함한 필요하다고 간주되는 행동을 개별적으로 혹은 다른 당사국들과 협력하여 실행함으로써 당사국을 지원할 것에 합의한다. 이러한 무력 공격과 그 결과 취해진 모든 조치는 즉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보고되어야 한다. 또한 이러한 조치는 안전보장이사회가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할 때 종료된다. >---- >북대서양 조약 기구 헌장 제5조 이후 1952년 2월 18일 그리스와 튀르키예가 가입했다. 튀르키예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 시대가 도래하자 역사적으로 앙숙이었던 소련의 강력해진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서구 진영에 편입되기 위해 외교적인 노력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50년 한반도에서 [[6.25 전쟁]]이 터지자 튀르키예는 지체없이 UN군의 일원으로 한국에 파병을 결정했다. 서구 사회로부터 한국전쟁 참전의 공로를 인정받은 튀르키예는 지리적으로 아시아 국가에 가까움에도 NATO에 가입이 승인되었다. 1955년 5월 9일, 그동안 소련의 눈치를 보느라 가입을 보류하고 있던 [[서독]]의 NATO 가입이 공식적으로 승인되었다. NATO는 소련에 대항하는 서방의 군사동맹이지만 초기에는 그러한 성격이 명확하지 않았다. 소련은 '''유럽의 안보에 이바지하고 싶다며 1954년 3월 나토 가입을 신청'''한 바 있었다. 그런데 일언지하에 거절된 것도 아닌 당시 회원국 간 격론 끝에 반려되었다. 1953년 3월 5일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한 후 소련 정세가 급변하고 있었다. 일단은 [[게오르기 말렌코프]]를 중심으로 한 [[집단지도체제]]가 들어섰지만, 그 밑에서 스탈린의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차기 후보들의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권력을 두고 경쟁관계인 이들이었지만 이들이 공통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숨도 제대로 못 쉬던 스탈린 시절에서 벗어나 억압적인 사회분위기도 풀고, 서방과의 긴장 관계도 풀고, 그동안 등한시했던 농업, 경공업도 양성해서 조금은 살만한 나라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게다가 때마침 중앙아시아에서 유전이 대거 터지자 석유 등 자원 수출을 위해서라도 서방과 화해를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도 대두되고 있었다. 그래서 [[굴라크]] 수용자들을 석방하고 북한, 중국을 압박해서 서둘러 [[6.25 전쟁]] [[정전 협정(6.25 전쟁)|휴전협정]]을 체결하게 하는 등 여러모로 미국에게 화해의 손짓을 보냈다. 소련이 나토 가입 신청 의사를 내비친 것도 이러한 차원에서 진행된 것이었으며 1954년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권도 소련에 대한 변화와 개방에 대한 기대가 잠시 있었던 시기였다. 하지만 소련의 권력 암투는 [[라브렌티 베리야]]의 처형 이후 흐루쇼프가 후계자 자리를 이어받는 것으로 빠르게 정리되어 갔고, 이후 소련은 동유럽의 민주화 움직임을 탄압하고 군비를 증강하는 등 냉전이 더욱 첨예해질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NATO는 1955년 5월 9일, 5년간 미뤄졌던 서독의 NATO 가입을 승인했다. 그러자 소련은 NATO가 반공 동맹을 형성했다고 맹비난하면서 불과 닷새 후인 5월 14일, 동유럽 위성국가들을 모아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창설했다. 이 구 바르샤바 조약기구 소속 국가들은 소련 붕괴로 인한 냉전 종식 이후 러시아를 제외한 모든 국가가 나토로 갈아타는 아이러니가 일어난다.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프란시스코 프랑코]]에 의해 중립국을 표방했던 스페인은 그의 사후 1981년 민주화가 이루어졌고 1982년 5월 30일 NATO에 가입하였다. 1990년 10월 3일 독일이 통일되었고, 당일부로 동독군이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탈퇴함과 동시에 서독의 독일연방군에 흡수 통합되어 NATO에 흡수되었다. 소련제 무기 일색인 구동독군이 NATO에 들어오면서 그동안 서방 국가들과 전세계 밀리터리 매니아들이 궁금해 하던 각종 소련제 무기들이 점차 베일을 벗고 실제 성능이 공개되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 적지 않은 밀리터리 매니아들이 실망하기도 했다. NATO군의 실전 참전은 냉전 시기에는 일어나지 않았고, 냉전이 끝난 후 1990년대 지옥도가 펼쳐졌던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코소보 전쟁]] 때 결국 NATO군이 개입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